출 생 : 1355년 이자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대담하였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아 20세가 되기 전에 명궁으로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성격은 과묵하고 책임감이 누구보다도 강하였고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당시의 시대적배경 : 북으로는 14세기 중반에 일어난 명나라가 원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대륙은 혼란하였고, 남으로는 왜구들의 끊임없는노략질로 백성들이 많은 피해를 보고있는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성계의 등장과 활약상 : * 고려말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힘입어 최영장군과 함께 원나라 군사를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워 이를계기로 태조이성계는 세력을 넓혀갔고 전라도 일대의 왜구를 격퇴시켰을 뿐만아니라 오랑캐를 무리치는 등 승승장구함. 이같은 활약상으로 벼슬이 높아지고 명성이나라안에 자자함.
위화도 회군 : 명나라를 공격하여 요동땅을 되찾으라는 우왕의 명령에 '4불가론'을 내세우며 말머리를 개경으로 돌려 회군함. 이로 인하여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력들의 추대를 받아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계기를 마련함.
4불가론 : ( 1) 작은나라로서 큰 나라를 치는것은 불가능함, 2)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함, 3) 요동으로 군사를 일으키면 왜구가 침공해 올수도 있다는 가능성 4) 장마철이라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며 군사들이 전염병에 시달릴 염려가 있어 불가함.)
태조가 되다 : 1392년 4월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를 받아 새나라의 임금이 됨. 걸림돌이 되었던 고려의 마지막 충신정몽주를 이방원이 제거함으로 인하여 임금으로서의 위치를 다짐.
민심안정책 : 국호를 단군조선을 이어간다는 뜻에서 조선으로 함. 서울을 한양으로 옮길것을 계획함. (풍수지리설과 무학대사의 조언)정도전을 비롯한 학자들에게 법제 정비를 서두름. (조선경국전)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펴나감.(향교 건립 및사찰정리)
태조의 가족관계 : 부인 8명, 자녀 8남 5녀 신의 왕후 한씨에게서 6남 2녀를 두었는데 이중 둘째 아들 방과(정종), 다섯째 아들방원(태종)임.
왕자의 난 : *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도와 가장 많은 공을 세운 방원이 왕세자 책봉에 불만이 많았고 정도전의 세력이 커가는 것을지켜볼수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난을 일으켜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함.(1차 왕자의 난) * 박포라는 사람과 함께 이방원의 형 방간이왕위에 욕심을 내어 군사를 일으켜 방원의 세력을 축출하고 왕위를 얻으려 하다가 싸움에서 패하자 유배를 떠나고 박포라는 사람은 사형을 당함.(2차왕자의 난)
咸興差使 : * 왕자의 난을 계기로 태조 이성계는 옥새도 내주지 않고 강원도 오대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종 이방원이 그를설득하여 옥새를 얻고 궁궐에서 지내도록 많은 차사를 보냈지만 그곳으로 갔던 차사마다 소식이 끊김.(심부름을 가도 사람이 오지 않을 때 우리들이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 * 결국에는 이방원을 임금으로 인정하고 무학대사와 함께 불교에 정진하며 1408년에 세상을떠난다.
태조의 주변의 인물들 : 1) 최영 : 태조 이성계와는 다르게 명문 가문 출신으로 반원세력에 앞장서는 뛰어난 명장이었다. 최영은이성계와는 다르게 군사의 성격도 보병위주였으며, 이성계가 개혁파임에도 불구하고 훈구파의 성격이 강했다.(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위화도 회군을계기로 이성계와의 관계가 갈등의 최고조에 이르렀고 이성계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지만 결국 먼저 죽음에 이른다.
2) 정몽주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을 세운 역성혁명론자라면 정몽주는 고려왕조를 유지하면서 혼란함을벗어나고자 개혁을 주장하는 고려개혁론자였다. 하지만 이성계의 세력에 의하여 선죽교에서 죽음을 당한다.
3) 정도전 : 보잘것없는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총명하고 영리하였다. 끊임없는 공부를 통하여 실력을 쌓은 후 이성계의 명성을 듣고 이성계와의 관계가 시작된다. 위화도회군에 이성계가 성공하자 이성계를 반대하는 일파를 몰아내기 위하여 힘을 기울였고, 조선이 건국되자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하여 법전을 편찬하였고서울을 옮기도록 건의하였으며, 유교 사상을 확립시켰으며 그밖에 이성계를 위하여 많은일을 하다가 1차 왕자의 난을 통하여 이방원에게 죽는다.
4) 무학대사 : 일개 장군인 이성계에게 '당신도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준 사람으로 출신성분이 보잘것없다는 이유로 불도에서 따돌림을 당하자 방랑생활을 하다가 이성계를 만나서 이성계의 서까래 꿈을 해몽하여 이성계가 후에 왕이 될 것을 장담하였다고함.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이성계가 서울을 옮길때 한양(지금서울)으로 옮길것을 주장함.
태조의 능에 관한 이야기 : 태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으며 (동구릉) 능 이름은 건원릉이다. 태조의 능은 지금도 갈대가깎기지 않은 상태로 있으며 이는 태조 이성계가 죽을때 고향의 갈대와 함께 하고싶다는 그의 유언 때문이다.
짧은 정치, 힘없는 임금 : 태조와 신의 왕후 한씨사이에서 2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안대군 방과) 태조의 장남인 방우가 병으로 세상을떠났기 때문에 이성계는 방과를 세자로 책봉했던 것이다. 여하튼 조선 2대 임금으로 추대되었지만 이방원 등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에 의하여 다스려지는나라의 허수아비 임금에 불과하였다.
왕자의 난 : 2차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피비린내 나는 형제들간의 싸움에 그는 탄식을 거듭하였고 왕권을 계속 잡고 있을 경우에는 방원에게죽음을 면치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동생 방원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무런 걱정없이 인덕궁에 살면서사냥과 온천을 즐기다가 세상을 떠났다.
정종의 치적 : 교지를 발표하여 새로운 정치제도와 그 제도를 시행하도록 명함.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분경금지법'을 만들었으며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정치와 군사에 관한 일을 분리시켰으며 수도를 한양에서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임금이 된 방원 : 두차례의 왕자의 난을 겪은 방원은 그 세력이 날로 커져만갔다. 정종은 아버지 태조를 설득하여 방원을 임금으로인정하도록 하였고 드디어 방원은 조선 3대 왕이 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위로 상왕을 모시고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하였다.
태종의 업적 :
민본정치 - 백성의 살림살이 파악을 위하여 '경차관'을 임명하여 파견 (개혁) 억울한 일 해결을 위하여궁성 문 앞에 신문고 설치 왕군강화 - 국가의 중요한 기관인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라고 명하고 문하부까지 합함 (입법과 행정이 한곳으로합쳐지니 임금의 권한이 강해짐) 조정 대신들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노비변정도감' 이란 노비들의 호적을 관리하는 기관을 설치정종때 옮겨졌던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천도함. 대외정책 - 왜인들의 범죄가 잦아지자 '왜인범죄논결법'이라는 책을 만들어 다스림.
문화정책 - 책과 학문의 소중함을 알고 학자들을 귀하게 여겼으며 기술 교육을 위하여 10학을 설치 하였으며 나라의 일을 맡을관리들을 능력과 실력 위주로 등용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절에 매여있던 노비를 공노비로 바꾸고 처녀로 중이 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게하였으며 고려시대에 나쁜점이 많았던 연등제와 초파일을 없앰과 동시에 일반 백성들 사이에 유행하던 참위설(음양오행설 등) 등 개인적인 신앙을 국가신앙으로 이끌어 유교를 숭상하게 만듦.
원경왕후 민씨 : 조선초의 학자이자 높은 벼슬을 지내고 있는 민재의 딸로 왕비가 되기 위하여 스스로 노력했던 인물이다. 제 1차 왕자의난 때에는 정도전 등이 남편 방원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알고 방원에게 주의를 시키는 한편 방원에게 감추었던 무기를 내놓는 등 민씨 덕택에 태종이방원이 왕자의 난에게 승리할 수 있었다. 이런 민씨라 자신의 주장이 매우 강하였고 이로인하여 태종과 잘 다투었다.
세자책봉 문제 :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와 4남 4녀를 두었다.(양녕, 효령, 충녕, 성녕대군) 장남인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으나외척세력인 민씨 집안의 세도정치를 우려한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의 형제자매를 모두 귀양 보내거나 평민과 결혼하게 하는 등 강력하게 외척세력을견제하였다. 이로인하여 총명하고 학문에 성실하던 양녕대군은 세자의 행동에 맞지않는 이상한 행동을 계속하였고 이로인하여 1418년 세자에서폐위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조정대신들과 합의하에 셋째 충녕대군이 세자로 재 책봉 되니 이자가 바로 조선 4대 임금 세종이다.
태종 때 기억할만한 일 : 신문고 제도 - 옛날 중국 송나라의 등문고 제도를 본따서 만든 제도이다. 신문고를 궁궐문 앞에 매달아 놓고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치도록 하였다. 무조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신문고를 치는 것은 아니다. 부하가 상관을 고발할 때에는 오히려 벌을주었다. 사소한 일로 신문고를 치는 자도 많아서 무질서한 현상을 낳기도 하였으며 연산군 때 폐지되었다가 영조때 부활됨. 의정부 설치 - 의정부의사무를 이, 호, 예, 병, 형, 공조 등 육조로 나눠 보도록 하였으며 의정부에는 덕망이 높은 중신들이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때만 모여서의논하여 임금에게 고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왕-의정부-육조 체제에서 왕-육조로 바뀌어 임금의 권한이 한층 강화된 것을 알수 있다.
예사롭지 않는 태몽 : 원경왕후 민씨가 셋째아들(세종)을 임신했을때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그 꿈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어느 화사한날 낮에민씨가 마루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데 집터에서 여의주를 물고 용(龍) 한마리가 북한산 꼭대기로 승천하여 하늘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그러고나서민씨는 꿈이 상서롭지 않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총명한 왕자 충녕대군 : 충녕대군 (세종)은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공부하기를 매우 좋아하여 추우나 더우나 밤늦도록 독서를 하였고, 그의아버지 태종이 밤늦게 독서하는 충녕의 건강이 걱정되어 오히려 밤에는 독서를 못하게 할 정도였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때마다 의견을 말하였는데 태종을비롯한 대신들이 생각지도 못한 의견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세종의 즉위 : 세자로 책봉된 양녕대군은 세종에 비하여 독서량도 많지 않았고 충녕과 비교되는 점도 많았다. 그리하여 태종은 양녕을폐위시키고 충녕을 세자로 다시 책봉한다. 1418년 드디어 충녕이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임금이 된 세종은 동방의 요순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정도로 훌륭한 임금이었다. 물론 세종의 뒤에서 눈에 보이지 않은 태종의 보살핌과 지도, 재상들의 공적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세종의 치적 :
정치 - 끊임없이 노략질하는 왜구때문에 백성들의 피해가 적지 않아 이종무를 시켜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정벌하고 유동성있는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김종서에게 명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정벌을 위하여 4군, 6진 개척을 하였다.
경제 - 조선초 공신들을 위주로한 토지의 집중현상이 보이자 '전제상정소'라는 중요한 기관을 두고 전제와 조세의 방법을 의논하였고합리적으로 토지를 조절하고 백성의 조세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나라의 재정이 확보되었다. 농민들이 농사를 과학적으로 짓도록 하기 위해 깊은 노력을기울이는 한편 농사에 관한 책을 편찬하도록 명하였고 그결과 '농사직설'이라는 책이 편찬됨.
사회 - '속육전', '경제육전등록'등 법전편찬으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으며 삼강행실도를 통하여 유교의 으뜸이 되는 사상을 백성들에게 실천하도록 권장하였다.
문화 - 집현전의 학자들과 함께 피땀흘려가며 한글을 창제하여 우리말을 쓰도록 하였다.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등 과학의 발달에노력하였다. 이는 농업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일이었다. 박연을 시켜 궁중의 아악을 정리하도록 하였으며 조선왕조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되었다.
세종의 가족관계 : 영의정 심온의 딸 심씨와 결혼하여 8남 2녀를 두었고 5명의 후궁에게서 10남 2녀를 두었으나 세종도 또한 여러아들을 두고 세자책봉 문제로 고민을 하였다가 결국은 몸이 허약한 첫째를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이후 건강이 약한 5대 임금 문종이 왕이 되기는하지만.....
세종의 신하 :
황 희 - 18년 동안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노비나 첩의 소생들의 천역면제 등 뛰어난 업적을 쌓아 칭송이 자자하였다.
맹사성 - 성격이 부드럽고 섬세하여 악공을 가르치거나 과거 응시자들의 학문적,문화적 소양을 점검하였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좌의정이 되었으며 평소 소타기를 좋아했다.
이종무 - 세종이 즉위한후 왜구의노략질이 심해지자 세종의 명을받아 대마도를 정벌 하였으며
김종서 - 용감하게 북쪽을 개척하여 종성, 회령, 경원, 경흥 등 4진을설치하고 다시 두만강 근처에 온성진과 부령진을 두었다. 이것이 6진이다. 이로 인하여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며 정치적으로 그의 입지가커졌다.
장영실 - 천민의 신분으로 태어난 그는 손재주가 매우 뛰어나 세종의 부름을 받고 궁중 기술자가 되었다. 중국에서 새로운문물을 배우며 천문기기에 매력을 느낀 장영실은 돌아와서 천문기구 등을 많들었으며 그는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이자 기술자였다.
세종대왕 - 대왕이라는 칭호는 후세 사람들이 생각하여 그의 업적이 매우 뛰어났을때 부르는 칭호이다. 세종은 타고난 능력과 자상하고부드러운 정치로 조선왕조에서 제일 훌륭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업적을 남기고 54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고 세종의 업적은 후에 조선왕조가500년 이라는 긴 세월동안 왕조를 유지하도록 하는 원천이 되었다.
문종(1414 - 1512) < 위로 >
문종의 즉위 : 1450년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8세때 왕세자로 책봉되어 29년 동안 왕세자로 머물러 있으면서 8년 동안 상왕의 대리로나랏일을 하다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으니 조선 제 5대 임금 문종이다.
문종의 업적 : 문종은 언론에 대하여 관대하였다. 6품이상의 신하들은 돌아가며 임금에게 의견을 올렸으며 문종은 의견들은 나름대로 수렴하여정치를 실행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후 정도전, 정초 등에게 명하여 편찬하고자 하였던 '고려사'를 완성하였다. 고려사는 고려 34왕475년간의 역사를 편찬한 역사책으로서 고려 시대의 기록이 담겨있어 가치가 큰 책이다.
문종의 병세 : 문종의 건강은 어렸을적부터 좋지 않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언론을 존중하여 너그러운 정치를 펼쳐나갔던 문종은 병세가 깊어가결국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세상을 뜬다.
세자 문제 : 문종은 건강이 약한 탓으로 인하여 자식도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 1남 1녀만을 두었다.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10세의 단종이임금으로 보위되어야 하는 불운을 맞게 된다.
단종(1441 - 1457) < 위로 >
어린 세자 : 1441년 (세종 23년) 비극의 주인공으로 결말을 맺게될 홍위(단종)가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도 아들을낳자마자 눈을 감았다. 그의 할아버지 세종은 그를 유난히도 귀여워 하였고 1448년 세종이 목숨이 얼마남지 판단되었을때 그를 왕세손 으로책봉하였다.
단종의 즉위 :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곧바로 즉위 하였으나 문종은 재위 2년만에 눈을감고 말았다. 문종이 승하하자 12세의 세자가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비극의 인물 단종임금이다. 보통 임금의 나이가 어리게되면 가장 지위가 높은 후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당시에 그럴만한사정이 되지 못했으며 수렴청정할 대왕대비도 이미 세상을 떠나서 단종은 더욱 외로웠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나랏일을 세종때부터 재상으로 지내던황보인, 정본, 김종서 등이 주가되어 나랏일을 처리해 나갔다. 이렇다보니 단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재상들이 나랏일을 마음대로처리했다.
계유정난 : 나라의 형세가 어린 임금을 두고 이렇듯 돌아가자 문종의 동생들이던 안평대군, 수양대군 등은 각자가 이름난 학자를 모으고스스로 힘을 길러갔다. 드디어 1453년 수양대군은 신숙주, 한명회, 권남 등과 함께 조정의 대신들이 어린 임금 단종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왕위로앉히려 했다는 구실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가 죽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계유년에 일어났다고해서'계유정난' 이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조정은 수양대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수양대군이 왕을 대신해서 나랏일을 처리하였다.
이징옥의 난 :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은 수양대군이 절제사를 다른 사람으로 임명하였다는 것이 수양대군이 처리한 줄 알고 난을 일으켜수양대군을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간다.
단종의 강등 : 수양대군의 동생 금성대군은 어린 조카 단종을 수양대군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하였지만 수양대군의 앞에서 모두 귀양을 가야하거나 죽음을 당했다. 단종은 두려움에 떨며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내놓고 1455년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사육신 : 수양대군이 왕위를 차지하자 조정의 대신들은 단종의 복위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함께 거사를 도모하기로 한 김질이 배신하고단종을 복위하려는 계획을 노출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은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들을사육신이라고 하며 죽는 순간까지도 수양대군을 욕하며 단종의 복위를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死六臣)
생육신 : 김시습, 이맹전, 원호, 조려, 성담수, 남효온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적극 반대하였으며 사육신과 반대로 벼슬을 거부하거나수양을 비난하는 등 살면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였던 사람이다. (生六臣)
수양대군 : 수양은 성격이 강하고 야심만만했으며 세력도 강했다. 안평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과 손을 잡게되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세력을 키워가야 할 생각을 하였다. 1452년 명나라에서 단종의 즉위를 인정한다는 고명을 보내왔고 조선의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감사의 뜻을 전할사은사를 보내야 했다. 수양대군 심복들은 상대세력의 커짐을 걱정하여 반대하였지만 수양대군이 이일은 종친의 의무이므로 가야한다고 겉으로주장하였다. 그리고 명나라를 자유롭게 여행하는 동안 그는 자유롭게 정권을 장악할 계획을 세워갔다.
세조의 즉위 : 단종세력을 하나둘 제거하고 1453년 그는 7대 임금 세조로 등극하였다. 세조는 정치를 잘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벗으려고백성들을 잘 돌보았다.
세조의 치적 : 사치풍조를 없애고 궁궐의 문화까지 검소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한 단종때의 왕권약화가 미치는 영향을 거울삼아 왕권을강화하여 의정부의 정책 결정권을 폐지시키고 6조의 직계제를 부활시켜 의정부의 기능을 약화하였다. 또한 국방력 강화를 위하여 호적, 호패제도를부활 시켰으며 두만강 건너 야인소탕, 서북면 개척 등 국토의 균형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문화적으로 세조는 불교를 숭상하여 1461년에 간경도감을설치하여 불경을 간행토록 하였으며 일본까지 유통시켰으며 태조이래 4대 임금을 찬양하기 위하여 '국조보감'을 만들고 세종때 시작한 '오례의'를완성
주변 인물 :
한명회 - 칠삭동이로 태어나 인물이 형편없어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자랐으며 과거에도 번번히 낙방하여30세가 넘도록 할 일이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였으나 한명회의 친구 권남의 천거로 수양대군에게 소개되었고 그후 수양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큰 공을 세웠고 오랫동안 세도를 누리면서 1487년 생을 마감한다.
권 남 - 한명회와 친구사이였던 권남은 과거에 세번 응시하여세번모두 장원 급제하여 '삼장장원'으로 이름을 날렸던 뛰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출세의 길이 열리지 않아서 세상을 원망하였으나 수양대군의 임무를수행하는 도중에 그 능력이 인정되어 한명회와 함께 부를 채우며 5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신숙주 - 세조와 동갑내기로서이해력이 뛰어난 학자이다. 1452년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갈때 동행하였는데 여기서 수양대군의 끈질긴 노력으로 친분을 맺게되어 비록역사적으로 변하기 쉬운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기는 하였지만 '국조보감'을 편찬 하였으며 고전과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였고 특히 외교와 국방에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서 세조의 오른팔이라고 불리울 정도였다.
가족관계 - 정희왕후 윤씨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고 둘째 해양대군은 8대 예종으로 오르게 된다.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죄책감에 많이 시달려야 했으며 결국 1468년 돌아올수 없는 길을 떠나게 된다.
세조의 고민 : 세조는 정희왕후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18세의 의경 세자가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를 계승할 준비를하고 있었다. 하지만 2년뒤에 아무런 이유없이 죽고 말았다. 그래서 해양대군이 세자를 계승하였고 이때 나이 19세 였다. 이가 바로 조선 8대임금 예종이다.
예종의 즉위 : 나이어린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원상과 함께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으로 나랏일을 돌보았다. 정희왕후는 남자처럼 성격이 대담하고결단력이 있어, 부드러운 예종의 성격과 조화를 이루어 나랏일을 무리없이 해나갈수 있었다. 1469년 삼포에서 왜와의 개별 무역을 금지시켰으며,세조때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하였다.
남이의 옥 사건 : 남이는 의산군 휘의 아들로, 태종의 외손이다. 어려서부터 활을 잘쏘고 힘이 장사 였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장원급제하였다. 그후 세조의 세력을 등에 업고 이시애의 난을 잠재웠으며 압록강 상류까지 원정을 가기도 하였다. 남이의 아래에 유자광이라는 갑사가있었는데 유자광이었다. 남이가 벼슬을 얻어 승승장구 하는데 비교되는 것이었다. 유자광은 계략을 세워 남이를 제거하기로 하고 계획을 세웠으며남이가 임금에 오르려 한다는 역모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으며 죽었다.
예종의 임종 : 1년 2개월 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왕위에 올라 있었으나 원상제도와 수렴청정으로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지도 못하고 죽음을맞이했다.
어려운 결단 : 예종이 죽자 왕위를 계승할 사람은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 이었다. 하지만 제안대군은 겨우 4세에 불과했다. 예종의 병세가심해지자 정희왕후가 원상들을 불러들여 이야기르 꺼냈다. 세조의 첫째 아들인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군을 다음 임금으로 지목했으나 원상들은 월산군의동생인 자을산군에게 뜻이 있음을 내비추고 종친들의 반발이나 부작용은 한명회를 비롯한 원상들에게 맡기고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자을산군을 왕위에오르게 하였다.
성종의 즉위 : 자을산군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제 9대 임금으로 올랐다. 정희왕후는 다시 수렴청정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주위에서는임금의 지목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바로 세조의 동생 임영대군의 아들 구성군을 두고 이른말이었다. 구성군은 출중한 인물이었으나 탄핵이들어와 1470년 아무런 죄도없이 멀리 귀양가게 되었으며 또한 원상들은 종친들을 관료로 등용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시켰다.
성종의 치적 : 성종은 총명하고 온순하였다. 그리고 정이 많았다. 성종의 업적으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바로 경국대전의 반포이다.1백여년에 걸친 법전의 반포로 국가의 중앙집권 체제는 더욱 강화 되었다. 성종 즉위 후 7년동안 할머니이자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하였다. 1476년 수렴청정이 끝나자 임금이 직접 나랏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 첫번째가 왕권강화 였다. 젊은 사람의 등용(사림파)으로 젊은문신들과 기존의 훈구 세력들의 세력을 적당히 견제 함으로써 나라를 안정되게 이끌어 나갔다. 성리학에 심취한 성종은 유교문화를 강화하기 위해서여러 정책을 펴 나갔으며 농업의 장려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성종은 국방정책도 훌륭하게 펴나가 두만강 방면의 여진족을 소탕하는 등 변방을안정시켜 전쟁에 대한 위협을 없앴다. 성종시대에는 '문화의 황금기'라고 일컬을 만큼 문화정책을 폈다.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으며 이로 인하여세상은 태평성대(太平聖代)에 이르렀다.
폐비윤씨 사건 : 춘추관기사관 윤기무의 딸로 뛰어난 미인인 윤씨는 어려운 생활을 하던중 후궁으로 들어왔다. 윤씨는 성종의 눈에 들어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1474년 왕비로 책봉된 윤씨는 그해에 아들을 낳아 그 기쁨이 두배에 달했다. 그러나 윤씨가 시기와 질투가 심하다는이유로 성종도 은근히 그를 멀리하였고 그러던 도중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자국을 남겼다는 이유로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를 비롯하여 조정의대신들도 윤씨를 폐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윤씨는 폐비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지만 주위에서는 윤씨를 원자가 자라나기 전에죽여야한다고 하였고 그로 인하여 성종은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1479년 인생을 마감하였다.
사림파의 등장 : 성종은 학문을 숭상하고 도학 정치를 꿈꾸어 왔다. 성종과 같은 사상을 가지고 관계에 진출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들이바로 사림파이다. 고려의 유신 길재가 은퇴한 후 고향인 영남에서 후진 양성에 힘쓴 결과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 사람들이 조선 시대의유학의 큰 흐름을 이루었다. 이들은 한명회, 유자광, 이극돈 등과 같은 기존의 훈구 세력을 권세나 잡을 줄 아는 간사하고 도량이 좁은사람들이라고 무시하였다. 성종은 김종직의 학문과 사상을 매우 좋아하여 그에게 형조판서의 벼슬을 주자 그의 제자들이 다시 몰려들어 기존의훈구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림파들은 '유향소제도'를 부활시켜 지방의 부정부패를 막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결국 성종은 사림을중앙에 등장시켜 훈구와의 견제를 이끌면서 왕권을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성종의 임종 : 25년 동안 정치를 잘하고 호화롭게 살다가 1494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음 왕의 자리를 폐비윤씨의 사이에서 태어난연산군에게 물려준다.
어머니없는 세자 : 왕자 융은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융이 4세때 태어났으므로 융은 정현왕후 윤씨가 자기를 낳아준어머니인줄 알고 자랐다. 융은 인수대비와 정현왕후 윤씨 사이에서 온갖 미움을 받으며 자랐고 그로인하여 융의 성격은 삐뚤어질 수 밖에 없었다.걸핏하면 화를 내고 책을 집어던지는 등 변덕도 심했다. 융이 8세가 되자 조정 대신들은 하루바삐 왕세자르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성종도 쉽게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인수대비와 상의한 끝에 왕세자로 책봉할 왕자가 융 밖에 없음을 알고 하는 수 없이 융이 왕세자로 봉해졌다. 그때부터11년 동안 세자 수업을 받으며 왕위에 오를 준비를 했다.
폭군 연산군 : 1494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19세의 세자 융이 왕위에 오르니 제 10대 임금 연산군이다. 성종이 정치를 잘하여평화로운 세상이었기 때문에 힘을 들이지 않아도 나라의 질서는 잘 유지되었다. 연산군은 선정을 베풀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폐비윤씨의 죽음을 알게 되었고 또한 거기에 관여한 자들도 알아 버렸다. 그후 연산군은 폭군으로서 점차 바뀌어가게 되었다. 연산군은 권력을 쥐게되자 문신들의 소리가 듣기 싫어 경연을 폐지하고 홍문관, 사간원도 없애고 각도에 채흥사, 채청사들을 파견하여 미녀들과 좋은 말을 뽑아 궁궐에서즐겼으며 부처님을 모시는 원각사를 기생 양성소로 만들어 버렸다. 이로 인하여 나라의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연산군의 이러한 폭정으로 그 밑의권력을 쥔 신하들도 횡포가 심해졌다. 연산군의 폭정은 점점 극에 달했다. 자신의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문이 국문으로 올라오자 훈민정음의 사용을금했다.
무오사화 : 왕에게 학문을 하라는 등 여러모로 학문을 중요시하는 사림파를 연산군은 매우 싫어하였다. 그러던 중 성종실록 편찬시 김일손이쓴 사초에 세조에 대한 비판의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알게된 연산군은 김종직의 묘를 부관참시하고 세조를 욕되게 하였다는이유로 사림파를 귀양보내는 등 사림파의 세력이 약해졌다.
갑자사화 : 무오사화로 언론기관이 없어지자 연산군에게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도 없어졌고 조정에는 연산군의 비위만 맞추는 사람들로들끓었다. 그중 임사홍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훈구파 세력을 몰아내고 남아있는 사림파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러던 중에 폐비윤씨가후궁의 모함을 받고 죽었다고 고해받쳤다. 이로인하여 화가 끝까지 치밀은 연산군은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 그후 인수대비는 병석에 누워 영원히일어나지 못하였으며 폐비윤씨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찾아내어 복수를 자행하였다.
중종반정 : 연산군은 재위 12년만에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학자들을 죽이고 경연과 대제학을 폐하였다. 더 기막힌 사실은기생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런일을 참지 못해 바른 정치를 하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연산군은 훈민정음을 상소나 하는 일로 쓰지 못하게하여 언문이라고 하여 쓰지 못하게 하였다. 연산군의 이러한 폭정에 대해 몇몇 사람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새로운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중종 (1488 - 1544)
중종의 즉위 : 진성대군으로 책봉되었다가 연산군의 폭정으로 성희안, 박원종 등의 추대로 임금이 된 중종은 새로운 정치를 펴기 위하여노력하였다. 어진 정치를 베풀고 연산군의 폐정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자 홍문관의 기능을 강화하여 임금의 자문을 맡도록하였다. 경연을 부활시켜 정책에 대한 논쟁을 자유롭게 하고 인재를 많이 등용시키기 위하여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등을 실시하였다. 과거제도의모순을 없애고자 조광조 등의 제청으로 현량과를 설치하고 인재를 뽑아 중요한 자리에 앉혔다.
개혁정치 : 조광조를 중심으로 개혁정치를 폈다. 성리학에 의거한 철인군주주의를 펴 나가기 시작하였고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미신 타파에주력하였다. 백성들의 상부상조 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향약을 실시하여 건전한 정신문화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파의 생각이급진적이고 이상적이라서 옛날사상에 물들어 있던 훈구세력이 쫓아오지 못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펴나가지는 못했다.
중종의 가계도 :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와는 자식이 없었으며 공신들의 반대로 폐비되었고 장경왕후 윤씨와 1남1녀를 두었고 문정왕후 윤씨와1남 4녀를 두었다.
삼포왜란 : 좌수사 이우징이 왜인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자 왜인들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대마도 소오의 힘을 빌러 5천 명의 군사를 일으켜부산포, 내이포를 함락시켰다. 이 사건이 바로 삼포왜란이다.
인종 (1515 - 1545) < 위로 >
효(孝)의 세자 : 1515년 장경왕후 윤씨의 맏아들로 태어난 호는 태어난지 일주일도 안되어 어머니인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문정왕후윤씨의 손에서 자랐다. 1520년 호가 6세가 되던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너그러운 마음씨와 인정이 많아서 사람들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고자랐다.
인종의 즉위 : 1544년 세자는 깊은 슬픔에 잠긴채 임금의 자리에 오르니 바로 12대 임금 인종이었다. 인종은 바른정치를 하고자 노력을하였고 그로인하여 어진 사람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알았다. 인종은 숨은 인재를 구하기 위하여 기묘사화로 폐지된 현량과를 부활시켰다.그리고 기묘사화의 일을 신중히 검토하여 나름대로의 교훈을 얻은 인종은 느리고 완만한 개혁을 펼쳐 혼란한 정치를 막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퇴계이황을 천거해 새로운 정치를 희망차게 펼쳐갔다.
인종의 요절 : 문정왕후 윤씨는 그의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자 인종을 어렸을 적부터 죽이려고 하였지만 계획이 성사되지 않았다. 모든것이 탈로나자 죽을 위기에 처해있었지만 효성과 마음이 넉넉한 인종 덕분에 계속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인종이 왕위에 왕위에 오른지8개월 30세의 젊은 나이에 어진정치를 마음껏 펼치지도 못하고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후계자 문제 : 인종은 인성왕후 박씨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었다. 후궁이 2명 있었으나 역시 그녀들 사이에서도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인종은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의 경원대군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하였다.
명종의 즉위 :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문정왕후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토록 바래왔던 모든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12세에 왕이된 명종은나이가 어렸으므로 자연히 대왕대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문정왕후가 권력을 손에 쥐자 윤원로, 윤원형 형제는 제세상을 만난것처럼활개를 치고 다녔다.
대윤과 소윤 : 중종때 장경왕후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고, 문정왕후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다. 장경왕후 윤씨나 문정왕후 윤씨는 모두파평윤씨였고 두 윤씨에게는 남동생이 각각 한명씩 있었는데 사람들은 장경왕후의 동생 윤임을 보고 대윤이라고 하였고, 문정왕후 동생 윤원형을 보고소윤이라고 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윤임이 득세하여 소윤의 기세를 꺽어 놓았으나 인종이 죽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문제는 달라졌다. 윤원형 파인소윤이 권세를 잡을 차례였다.
수렴청정 : 문정왕후 윤씨는 명종의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대윤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동생 윤원형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로인하여 대윤은 기세가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소윤이 안심하기에는 아니라고 판단하여 그들은 다시 '양재역 벽서사건'을 일으켜 소윤은확실하게 권력을 잡고 조정을 뒤흔들기 시작하였다.
명종의 정치 :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뜻을 거르지 않고 나라를 잘 다스리려고 애를썼다. 하지만 그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명종은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재위기간동안 최선을 다하였다. 하지만 조정의 권력남용과 사회가 어지러우니 지방의 수령들도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빼앗는 등위기를 초래하였다.
임꺽정 : 1571년에 쓴 명종실록을 보면 임꺽정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있는데 그 내용은 "임꺽정과 그 무리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잘못이지 그들의 잘못이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임꺽정을 의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는 임꺽정을 다르게 본다. "임꺽정은단순히 도적의 우두머리일 뿐이다. 그는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둑이다." 아무튼 임꺽정은 5년동안 나라를 휩쓸고 다니며 전국을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을묘왜변 : 조선의 두통거리 중의 하나는 왜구였다. 조정은 권력다툼으로 혼란하고 지방은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느라고 정신이없고 국방에는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왜구들은 문제를 일으켜 남해안 지방을 침입하였다. 하지만 중앙에서 손을써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세자된 하성군 :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순화세자가 죽은지 몇 년이 지났지만 후사가 없었다. 나날이 수척해가는 명종을보며 조정의 대신을 비롯하여 인순왕후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명종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세자책봉을 서둘러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세자문제를다루기 위해서는 중종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중종과 장경왕후 사이의 인종,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 사이의 명종, 그러면 하성군 (선조)는누구인가? 중종은 2명의 왕후와 5명의 후궁을 두었다. 5명의 후궁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대윤과 소윤의 다툼에 화를 면하지 못하고 모두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중종과 창빈안씨 사이의 덕흥군만이 화를 면하였다. 덕흥군은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3째아들 하성군은 총명함과 덕을 쌓아서명종이 그를 총애하고 마침내 세자로 책봉한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하성군은 세자에 오르게된다.
선조의 즉위 : 1567년 7월 하성군이 경복궁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니 바로 우리 민족사상 가장 큰 불행을 겪게되는 14대 임금 선조이다.이때 선조의 나이 16세 였으므로 인종의 비 인성왕후가 대왕대비가 되고 그의 어머니 심씨가 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거행하게 되었다.
선조의 업적 : 즉위당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나랏일을 잘 돌보았다. 매일 경연을 열어 정사를 논하였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바른정치를 베풀려고 노력하였다. 기묘사화때 죽은 조광조의 죄를 풀어주는 등 억울한 사람을 조사하여 원한을 풀어주었다. 또한 현량과를 다시 실시하여이처럼 선조가 국사를 능숙하게 처리하게 되자 심씨는 1년만에 수렴청정을 거두게 되었다. 나라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조정은 평안하였다. 또한이황과 이이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두사람에게 어려운 일은 자문을 구하였으며 정성을 다하여 섬겼다.
당파싸움 : 선조가 즉위하여 나라가 평안을 되찾아갔지만 조정은 다시 당파싸움에 휘말리기 시작하였다. 명종때는 대윤과 소윤이 갈려 싸우던것이 선조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것이다. 동인 신진세력 이었고 서인들은 나이가 들은 기성세대였다.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조정은 나랏일을의논하면서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의견에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고 있었다. 이에 율곡 이이는 선조에게 탕평책을건의하였다. 하지만 선조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후궁에만 빠져 있었다. 이처럼 정치가 혼란하자 국방력이 흔들리게되어 야인들에게 침략을 받게되었고 왜인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임진왜란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내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하나로 통일하면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힘을 국내에두기보다는 해외로 나가게 함으로써 일본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대륙 침략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1592년일본은 15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일본군은 3군으로 나누어 조선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회의를 열고 대처하려하였지만 속수무책 이었다. 한양 함락이 임박하자 조정의 대신들과 함께 평양으로 피난을 가기로 하였다. 일본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 하였고선조는 다시 신의주로 피난을 가야만 하였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적과 싸웠으며 남해안 일대에는 이순신 장군이 승승장구 하였다.명나라의 원조에 힘입어 평양을 탈환하였으나 다시 일본군은 1597년 정유년에 14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였다. 이를 정유재란이라 하는데,결국 명나라와 의병, 수군 등으로 인하여 일본군을 물리치고 조정은 전쟁을 끝내게 된다.
이순신 (1545-1598) : 서울에서 태어나 어렸을적 부터 용맹하였고 결국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다. 그후 권지훈련원 봉사,발포만호, 녹도 둔전사의를 거쳐 전롸좌수사에 임명된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의 능력은 후세에까지 남게 되었고, 부모님을 생각한는 효성또한지극하였다. 임진왜란때 옥포에서 첫승을 거둔후 싸움을 할때마다 승리하였고 한산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 굵직굵직한 싸움에서 승리하였다.삼도수군통제사가 되기도 하였지만, 대신들의 모략으로 인하여 갖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고 이때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말라"는 말로 유명하기도 하다.
이 황 (1501-1570) : 경북 예안에서 출생하였으며 태어난지 7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진사에 합격하여승진을 거듭한 끝에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가 제자를 양성하였다. '주자전서'라는 책을 읽고 난 후 성리학에 깊이 빠졌다.이황은 주자의 주장에 따라 우주를 이(理), 기(氣) 이렇게 이원으로써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와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있다는 말이다. 이는 기를 움직이는 기본 법칙을 의미하며, 기는 형태를 갖춘 존재로서 이의 법칙에 따라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여이기이원론을 발전시켰다. 학문이 대성하자 '동방의 주자'라고 칭하였다. 인품과 학식이 뛰어나 조정에서 자주 불렀으나 벼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임진왜란 이후 이황의 학설은 일본에 소개되어 일본 학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이 (1536-1584) : 강릉에서 태어난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어렸을적부터 영리한 그는 13세때 진사초시에 합격하였다. 16세때 어머니를 여의자 세상의 허무함을 느껴 한때 불교를 연구하였으나 다시 성리학에 발을 들여놓는다. 명성이 자자한 이황을직접 찾아가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이이는 이황의 학설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이 (理)와기 (氣)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또 먼저와 나중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기는 세상이 생기면서부터 동시에 존재하여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주기론을 주장하여 아는 것보다 실천을 더 중요시 하였다. 당파싸움이 심해지자 성격이 활달하고 호탕한 그는 동인과 서인의 충돌을 막으려고 애를썼다.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예지력도 갖고 있었으나 당파싸움으로 인하여 그의 주장은 백지가 되었고 49세의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자책봉 문제 :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몸이 약하여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궁들은 아들을 많이 낳아 14명이나되었다. 선조는 후궁에게서 난 아들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지 않아 의인왕후가 아들을 낳기를 기다렸으나 선조의 나이 40이 넘어서도록 태기가없었다. 이처럼 세자 문제가 붉어지자 대신들은 세자책봉 문제를 서둘렀다. 이때 동인과 서인의 의견대립으로 선조가 사랑하던 신성군은 희생되고광해군이 세자에 오르게된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였지만 명나라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1600년 의인왕후가 죽자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 김씨가 선조의 아들 영창대군을 낳았다. 선조는 왕후가 낳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 하려고하였으나 선조가 병석에 눕자 어린 영창대군 보다는 광해군을 왕위에 오르라는 교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의 즉위 : 광해군은 조선 15대 임금이다. 힘겹게 왕위에 오른 그는 나라를 잘 다스려야 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그 역시당파싸움의 소용돌이 휘말리고 말았다. 광해군은 임금이 되었지만 여전히 명나라의 고명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광해군은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명나라를 섬기고 싶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소북파를 싫어했다. 이로인하여 광해군은 자신의 강력한 왕권을위해서는 반대세력을 몰아내야 했다. '계축옥사'로 인하여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소북파를 제거하였다. 이렇게 당파싸움에휘말려 있는 동안 나라의 부정부패는 심해졌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궁궐을 다시 짓고자 영건도감을 설치하여 토목사업을 맡아보도록하였다. 이처럼 건축사업이 활발하자 부족한 재정을 메워 나가기 위해서는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 일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사회는 병이 들었다.
중국대륙의 판도 : 1618년 만주 대륙에서 일어난 누르하치가 나라를 세우고 후금이라 칭하였다. 후금은 세력을 크게 넓히려고 침략을일삼았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통하여 전쟁의 잔인함과 피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창 일어나는 누르하치와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신축성 있는 외교정책을 펴 나갔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후금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웠지만외교정책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다.
사회의 변화 : 당파싸움이 쉬지 않고 일어나니 백성들은 살고 죽는일에 대해 허무함을 느꼈다. 그래서 유행한 것이 풍수지리설이었다.사람들은 부지런히 공부하여 출세하는 것보다, 명당 자리에 조상의 묘를 쓰고 좋은 터에 집을 지음으로써 가만히 있어도 복이 굴러 들어온다는 망상을하게 되었다.
광해군의 폐위 :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서인들은 세력이 많이 약해졌다. 하지만 끝까지 제거되지 않은 김자점과 이귀 등이1623년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대북파는 몰락하였다.
홍길동전 : 지은이가 허균인 홍길동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로서 그 문학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홍길동전은 조선 시대의 불평등한사회적 모순을 지적하는 사회 풍자 소설이기도 하다. 이는 지은이 허균의 삶과 주인공 홍길동의 모습이 비슷하다. 중국의 유명한 소설인 '수호전','서유기', '삼국지연의'등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동의보감 : 1546년 김포의 무인집안에서 태어난 허준은 29세에 의과에 급제하여 내의원 의관으로 출발하였다. 의학에 밝은 그는 왕자의병을 낫게 하는 등 의술이 좋아 칭송이 자자하였다. 허준은 내의원에 있으면서 의학 연구를 하였다. 선조의 어명을 받아 내의원에 편찬국을 두고여러 의관들과 함께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한나라 시대에 이미 체계화되어 있느 한의학을 중심으로 동방 의학을 모두 모으고그와 함께 우리 민족 의학을 바로 세우자는 뜻을 가지고 편집에 임하였다. 광해군 3년 1611년 완성되었다. 한국 의학의 우수성을 널리 알린귀중한 책이다.
인조반정 : '계축옥사'로 인하여 영창대군이 죽고 인목대비가 궁에 갇혔다. 이로 인하여 서인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때 서인인이귀, 김자점, 이괄 등은 광해군을 몰아내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고 힘은 커지게 되었다. 어려운 고비끝에 반정은성공에 이르고 광해군은 폐위되었다. 그리고 능양군이 즉위하게 되었다.
인조의 즉위 : 1623년 경운궁에서 능양군이 즉위하니 16대 임금 인조이다. 인조는 왕위에 오르자 반정을 성공시킨 서인에게 상을 내리고인목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 여주에 귀양을 간 이원익을 불러 영의정 자리에 앉히고, 공신들에게 벼슬을 내렸다. 인조는 왕위에 올라 할 일이많았다. 먼저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를 살리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제해야 했다. 그러러면 검소와 절약을 생활화해야 했다. 성품이겸손하고 문장에도 뛰어나며 글씨도 잘 쓰는 인조는 사치와 오락을 멀리하였다.
인조의 업적 : 1623년 경기도에만 실시해 오던 대동법을 강원도까지 확대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도 쉽게하였다. 1626년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그 부근을 중심으로 여러개의 진을 지키기 위한 수어청을 설치하였다. 또한 북방과 해안 지방의 경비도강화하였으며 군역을 세금으로 대신하는 제도도 마련하였다. 두번의 호란으로 인하여 폐허가 된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여러일을 하였다. 화폐의필요성을 느껴 상평통보라는 화폐를 만들었으며, 청나라 사람들과의 민간 무역을 장려하기 위하여 북관의 회령 및 경원, 압록강변의 중강에 시장을열어 주었다. 1634년에는 충청도, 전라도 등 삼남에 양전을 실시하여 농사를 지을수 있는 땅을 정확하게 측정하여 세금 수입을 늘리는 한편농민들에게 부담을 주는 전세법을 폐지하였다.
정묘호란 : 임진왜란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조정의 대신들은 당파 싸움으로 날가는 줄도 몰랐고 국방 정책도 제대로 세워져 있지않았다. 후금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이로인하여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우리에게 불리한 세가지 요구사항을허락하고 결국 후금과 형제의 나라가 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병자호란 : 1636년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바꾼 누르하치는 조선과의 관계를 형제에서 군신관계로 바꾸자는 제의를 해왔다. 조선이이를 허락하지 않자 청은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왔다.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하는데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가 45일만에 삼전도에서항복하였다. 이로써 청과 조선은 군신의 관계를 맺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볼모로 잡혀갔다.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한 인조는 청나라를 더욱 싫어하게되었다.